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며 생각했던 것들을 기록해본다.
1. 행복에 대해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복이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행복이란 욕망을 실현시키는 데에 있지 않다. 욕망을 실현 시키는 것보다는, 주어진 삶을 소중히 여길 때, 행복은 거기에 있다.
2. 삶에 대해
삶이란 특별하고 위대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영원할 것 같던 사랑도 일상이 되고, 충족을 주는 쾌락들도 시간과 함께 사라진다. 삶이 이토록 사소한 것들로 이뤄진다는 것에 좌절하는 대신, 사소하기에 그것들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것들로 이뤄진 것이 삶이고 또 그것만이 삶이다. 그 사소한 삶의 조각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을 때 그것에 감사한다면 행복을 느낄 것이다.
3. 조화에 대해
삶의 조각들이 조화를 이룬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어느 것도 과잉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것, 과잉되지 않는 것은 행복에 도달하는 가장 중요한 법칙이다. 우리는 우리 몸의 어느 한 부분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해진다면 그것을 병에 걸린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삶의 일부분이 비정상적으로 거대해지기를 염원한다. 돈이라던지 명예라던지 하는 삶의 조각들이 과잉되면 그것은 분명 삶을 무너뜨리는 원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4. 인간의 가능성에 대해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 삶일까 라는 질문을 갖고 사는 한, 해답은 우리 삶 속에서 늘 발현될 것이다. 어떻게 살고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머리속으로 답을 찾으려 너무 깊게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그걸 고민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 풀을 잘 벨 것인가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낫질은 하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해답은 태어날부터 우리 안에 주어져있으며 그것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무한한 영역에 있다. 인간의 가능성은 무한하여 , 그것을 옭아매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모든 진리에 가 닿을 것이다.
5. 사랑에 대해
사랑이란 자신의 담이 낮아지는 것이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사랑을 하면 자신이 못나 보일 수 밖에 없다. 그건 자기 열등감이 아니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인간의 어쩔 수 없는 특성이다. 레빈은 키티를 볼 때면 자신이 너무나 하찮고 시시해 보였다. 아름다운 키티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어쩌면 그것이 진짜 사랑의 모습이다.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베풀듯이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그 사람 앞에 서면 자기 자신이 스스로 작아지고 잘 보이고 싶어 지는 감정이야 말로 사랑이다.
브론스키와 레빈의 사랑은 그런 면에서 판이하게 달랐다. 브론스키가 안나에게 주는 것은 동정에 가까웠다. 처음에 그것은 사랑에 가까웠으나 그들의 비정상적인 관계는 서로의 담을 낮추기는 커녕 서로 자신의 담을 세우고 네가 먼저 담을 낮춰라 라며 투쟁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것이 사랑이라 믿었지만 결국 결말은 참혹했다. 레빈은 키티를 사랑하며 자신의 담이 낮아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키티는 낮아진 담을 넘어 그의 세상 속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사랑했고, 행복했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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