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쉬는 동안 좀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어보고 싶어서 생전 안 읽어본 분야인 물리학 서적과 종교서적에 도전했다. 두 권을 모두 읽고 보니 두 책에서 묘하게 맞닿는 부분을 발견했는데, 그게 내겐 꽤 신기하여 기록해두기로 한다.

[카를로 로벨리 - 모든 순간의 물리학]
독일 출신의 천재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전자가 언제나, 어느 곳에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다른 무엇인가가 전자들을 봐줄 때, 즉 무엇인가와 상호작용을 일으킬 때만 전자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한 궤도에서 다른 궤도로의 '양자 도약'이 실제로 전자들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한 전자가 다른 무엇인가와 상호작용을 통해 도약을 하게 된다. 하지만 방해하는 요소가 아무것도 없으면 정확히 어느 장소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양자역학에서는 다른 무엇인가에 부딪히지 않는 한 그 무엇도 확실한 자기 자리를 갖지 못한다. ( 38P~39P )

[텐진 갸초 - 달라이 라마 반야심경]
십이연기에 대한 가르침의 핵심은 모든 현상 -우리가 체험한 경험, 사물, 사건- 이 여러 원인과 여러 조건이 만난 결과로 발생한다는 것이다.
부처님은 한 개인이 경험하는 모든 것은 물론 모든 사물과 사건은 원인과 조건이 결합된 결과로 생긴 것에 불과하다는 것을 십이 연기를 통해 가르쳤다. 이것을 이해하면 모든 사물은 본래 상호 의존적이며 전적으로 다른 사물과 다른 요소가 만나 그 결과로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존재가 다른 존재에 의존해서 생긴다는 것은 고유한 실체나 독립된 실체를 갖고 있지 않음을 의미한다. (54P)
하이젠베르크가 설명하는 양자역학과 , 반야심경에서 말한 연기법 모두 대상을 ‘본래부터 존재하는 독립적인 것’ 이 아니라 상호작용을 통해, 조건이 충족될 때만 나타나는 결과물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하단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새삼스레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상호작용이라는 조건하에 생겨난 것들은 그 특성상 독립적인 실체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은 생각이 필요한 대목이었다. 우연하게 조건이 충족되어 생겨난 존재들은 그 조건이 변화하거나 사라지면 그에 따라 언제든 변하거나 사라질 수 있다. 이 말은 곧 절대적이고 불변하는 것은 없다는 말이고, 그런 성질이나 속성도 없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달라이 라마 반야심경을 좀 더 읽다 보면, 이 개념을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깨달아야 할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번뇌는 본래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다. 번뇌는 절대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다. 예를들어보자
어떤 문화권 사람들이 맛있다고 생각하는 음식을 다른 문화권 사람들은 혐오스러워 할 수도 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탐탁하지 않다는 것은 우리 주관의 반영일 뿐이지 대상이나 경험에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59P)
결국, 지금 내가 혐오스럽다고 (혹은 좋다고) 느끼는 상황이나 사물은 본래 그런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단지 여러 가지 조건들 -내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나 주관 같은 것들- 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일 뿐이라는 것.
정말 쉽고 단편적으로 말하자면 무언가가 혐오스럽다면 대상이 정말 '혐오스러운'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생각과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며 주어진 상황이 '괴롭다' 면 그 상황이 절대적으로 괴로운 상황이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혐오할 일도, 화낼일도 없다. 너무 좋아서 중독되거나 집착할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괴로워하고 좌절할만한 것도 사실은 없다. 전부 나의 주관의 반영일 뿐이다. 결국 나에게 주어진 상황, 내 눈앞의 사람이나 사물에 대해 좋다, 싫다 판단을 멈춰야 괴로움도 멈출 수 있다.
머리로는 읽은 것들을 이해하겠는데 이해한 게 자연스럽게 실천되기까진 아직도 멀었다. 자꾸만 잊어버리고 이건 좋다, 저건 싫다, 판단하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불안과 걱정을 이어나가다가 뒤늦게 아차 하고 생각을 되돌리게 된다.
길을 아는 것과 길을 가는 것은 다르다. 덜 괴로워지는 길을 알았지만 실제로 덜 괴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세 교정하듯 머릿속 생각을 자꾸 교정해나가야만 할 것 같다. 몇십 년을 이렇게 살아왔으니 순식간에 바뀌긴 어렵다는 걸 인정하고 꾸준히 교정해 나가보려 한다. (17.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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