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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희, <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 를 읽고

북펀딩에 참여했던 한수희 작가님의 '조금 긴 추신을 써야겠습니다'를 읽었다.

 

‘우울할 때 반짝 리스트’ ,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 ‘온전히 나답게’ 이후 네 번째로 읽은 한수희 작가님의 책이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책이 나오면 사보고 싶어 지는 작가 리스트에 한수희 작가님도 추가된 것 같다. 

 

이번 책은 영화와 책에 대해 어라운드 매거진에 연재했던 글을 엮은 책이라고 하는데, 좋은 영화와 책에 작가가 붙이는 ‘조금 긴 추신’ 들을 읽어볼 수 있다. 딱딱한 평론이 아닌 내가 최근에 본 영화 재밌더라,  왜 좋냐면 말이야 하고 가볍게 말을 걸어오는 느낌이라서 좋았다.

 

이 작가님의 책이 왜 좋을까, 생각해봤는데 무리하지 않아서인 것 같다. 내가 얼마나 글을 잘 쓰는지 엄청나게 멋지고 감동적인 문장을 써서 보여줘야지! 하는 부담스러움이 없다. 이건 맞고 저건 틀리다는 잣대를 섣부르게 들이밀지도 않는다. 스스로의 멋진 면면들만 보여줘서 ‘멋지다, 닮고 싶다’ 소리를 이끌어내는 것과도 조금 거리가 있다.

 

대신 아주 솔직하다. 자주 실수하고 방황하고 실패하며 살아왔다고, 지금도 삶은 두렵고 막막하기만 해서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어른인 척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러나 단순히 ‘다들 힘들게 살고 있으니 너도 그냥 참고 살아’ 같은 메시지를 전하려고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자신의 보여주고 싶지 않은 미숙했던 모습, 힘들었던 시간들을 솔직하게 드러낸 글을 읽으며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같은 근거 없이 낙천적인 말보다 훨씬 오래남을만한 위안을 받았다.  저 사람도 힘든 시간들을 거쳤구나, 나만 이러고 있는게 아니구나 하는 친밀감과, 힘든 시간을 꼭 이겨내지 못하더라도 그냥 그것들과 함께 살아 나갈 수 있겠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꼈다.

 

가까운 사이가 아니고서야 요즘 힘들다는 말을, 혹은 힘들었다는 말을 꺼내는 건 참 어려운 일이다. 가까운 사이더라도 듣는 사람에게 부담이 될까봐 힘들었던 사건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는 공유하지 않게 되기도 한다. 힘듦보다는 즐거움을 공유하는 것이 훨씬 좋은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러나 어쩌면 내가 막 헤치고 나온 힘든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고, 도움이 될만한 조언을 찾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럴 때 먼저 힘든 시간을 겪어낸 사람의 경험담은 큰 위로와 희망이 되어 줄 것이다. 

 

내가 지나쳐 온 힘든 시간들을 구체적으로 공유하는 게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종종 들곤 했는데,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아무 소용도 없고 결실을 맺게 될지 아닐지 모를 일. 그런다고 세상이 털끝 하나 달라질 것 같으냐는 소리나 듣기 딱 좋은 일. 하지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는 세상에서도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 나는 그런 것이 좋다. 언제나 그런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고,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고 싶다.' (93P) 


'나의 실패를, 내가 겪은 모든 실패를 아직 이루지 못한 성공과 연결 지어 본다. 그러다 문득 그것이 실패였는지, 아니었는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실패 같기만 했는데 지금 보니 그건 그저 내 인생에 일어난 어떤 일일 뿐이었다. 그 후에도 인생은 끝나지 않았고 또 다른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실패도 성공도 아닌 일들이. 길을 잃은 것 같았던 때에도 인생은 흘러가고 있었다. 사랑이 끝난 후에도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원하던 걸 갖지 못했어도 쉽게 비참해지지는 않았다. 그저 살아왔을 뿐이다. 그리고 그저 살아갈 뿐이다. 실패도 성공도 괘념치 않고.' (107P)


' 두려움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자신을 기만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힘과 희망은 원래부터 거기에 있던 것이 아니라, 닥친 과정들을 하나씩 해나가면서 자라나는 것이니까. 딱히 누가 알아줄 일도, 자랑할 만한 일도 아니지만 그런 것에서 나는 작은 안도감을 느낀다.' (166P)


'사실을 말하자. 나는 어른인 척을 하며 산다. (중략) 우리에게도 인생은 여전히 어렵고 두렵고 막막한 것이다. 인생이 뭔지,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이를 먹고 책임져야 할 것들이 생겼으니 어째 됐든 운전대를 잡고 달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가 어른이 아니라고 하면,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다고 하면 그건 꼴사나운 투정밖에는 안 되니 운전을 하고 통장을 만들고 부동산 계약서를 쓰는 것이다. 언제나 떨리는 마음으로.'  (200P)